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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한다고 한 말이 상대에게는 상처였던 적, 혹시 있지 않으셨습니까?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면서 그 질문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박보영 배우가 1인 2역으로 쌍둥이 자매를 연기하는 tvN·넷플릭스 드라마인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단순한 신파가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1인 2역? NO, 1인 4역 YES
1인 2역(一人二役)이란 한 배우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얼굴은 같지만 성격과 삶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을 혼자 소화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는 사실 알면서도, 처음엔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작품에서 시도된 방식이니까요.
막상 보기 시작하니 달랐습니다. 쌍둥이 언니 미래는 머리가 뛰어난 대신 몸이 약하고, 동생 미지는 학업과는 거리가 멀지만 신체 능력과 손재주가 탁월합니다. 둘의 강점과 약점이 정반대인 셈인데, 이 작품이 영리한 점은 그 차이를 극단적으로 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서로를 흉내 내는 능숙도의 차이였습니다. 미지는 원래부터 표현력이 풍부하다 보니 언니 미래를 꽤 잘 따라합니다. 반면 미래는 감정 표현이 절제된 성격이라, 동생 미지를 흉내 낼 때 미래 본인의 습관이 자꾸 묻어납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화면에서 느껴진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박보영 배우가 사실상 네 가지 상태—미지가 연기하는 미래, 혼자 있는 미지, 미래가 연기하는 미지, 혼자 있는 미래—를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어서 사실상 1인 4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호수 역의 박진영 배우도 빠질 수 없습니다. 이 캐릭터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변호사인데, 연출이 그를 '멋있는 사람'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슬로우 모션도 없고, 모델 워킹도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의 하루를 보여 주는데, 어느 순간 멋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연출의 힘이면서 동시에 배우 본인의 힘이기도 합니다.
- 미지(동생): 표현력·신체 능력 강점, 언니 흉내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소화
- 미래(언니): 지적 능력 강점, 동생을 따라할 때 본인의 절제된 습관이 배어 나옴
- 이호수: 과장 없이 '행적'으로 매력을 증명하는 캐릭터, 박진용 배우의 내공이 돋보임
이 드라마가 마음쓰이게 만든 이유 — 감정이입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여러 인물에게 동시에 마음이 쓰인 적이 오랜만이었습니다. 미지가 안쓰러웠던 건 단지 언니와 비교당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학창시절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뒤, 연락 한번 먼저 하는 것조차 껄끄러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었습니다.
미래는 또 어떻습니까. 좋은 직장, 서울 생활. 겉으로는 성공한 언니처럼 보이지만, 직장 내 괴롭힘(workplace bullying)—이는 직장에서 지위나 관계를 이용해 특정인을 반복적으로 배제하거나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합니다—으로 정신적 한계에 몰려 있습니다. 심지어 '다쳐서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저도 한때 번아웃(burnout)으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 있습니다. 번아웃이란 과도한 업무나 스트레스가 지속되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업무 과부하와 책임감이 원인이었는데, 드라마 속 미래처럼 사람 관계에서 오는 상처라면 과연 제가 버텨낼 수 있었을까 싶어 더 먹먹했습니다.
이호수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죄책감을 안고 살면서, 자신의 청각 장애가 상대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관계에 먼저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호수 어머니. 친모가 아님에도 친어머니처럼 키웠건만, "이제 엄마 인생 사세요"라는 말을 아들에게서 듣습니다. 그 말이 아들에게는 배려였겠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비수였겠지요. 사실 엄마 분홍을 살아가게 한 것은 호수 자신이기도 했는데, 그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로 말을 삼키며 살았던 겁니다.
배려의 역설 — 내가 주고 싶은 배려가 상대가 원하는 배려일까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 거의 모두가 배려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짐이 되기 싫어서 말을 안 하고, 상처 주기 싫어서 거리를 두고, 힘들다는 말 대신 웃어 보입니다. 근데 그게 정말 배려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가장 오래 생각이 걸렸습니다. 배려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제가 받고 싶었던 방식의 배려이지, 상대가 원했던 배려가 아닐 수 있다는 거. 사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처음엔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론을 냅니다. '나는 저 사람한테 짐이 될 거야',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그런데 어떤 계기로 입 밖에 꺼내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됩니다. 정체를 바꿔 서로의 삶을 살게 된 쌍둥이가 그 역할 교환(role switching) 덕분에 비로소 서로의 진짜 모습을 엿보게 된다는 구조도 같은 맥락입니다. 역할 교환이란 자신의 위치를 떠나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경험을 말하는데, 심리학적으로는 공감 능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로 꼽힙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공감 관련 자료).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엔 처음 등장할 때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겠구나' 싶었다가, 나중에 그 사람만의 싸움이 조금씩 보이면서 판단을 거둬야 했던 경우가 여럿 있었습니다. 이게 주연 캐릭터가 아닌 조연에서도 나온다는 게 특히 좋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모든 인물이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화면에서 그 시간을 충분히 못 봤을 뿐이라고.
물론 단점이 없진 않습니다. 러닝타임이 회당 80분 가까이 되고, 편집 연결 컷(continuity cut)—같은 장면을 여러 앵글에서 촬영해 이어 붙일 때 인물의 동작이나 소품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 기술—이 튀는 장면이 중요한 신에서 간혹 등장합니다. 몰입이 한 번씩 깨지는 순간이 아쉽긴 했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계속 보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지의 서울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현재 티빙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회당 러닝타임이 80분 가까이 되는 편이라 시간 여유 있을 때 보시면 더 편하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Q. 박보영 1인 2역인데 헷갈리지 않나요?
A. 헷갈리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미래와 미지를 직접 연기할 때와 서로를 흉내 낼 때까지 네 가지 상태가 각각 구분되어 느껴집니다. 처음 1~2화 정도만 보시면 자연스럽게 감이 잡히실 겁니다.
Q. 무거운 내용이라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A. 직장 내 괴롭힘, 가족 간 상처 같은 무거운 주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로맨스와 코믹한 상황이 골고루 섞여 있어 톤이 생각보다는 가볍습니다. '나의 아저씨'를 비교해본다면 훨씬 덜 무거운 느낌이라 두근거리는 맛으로도, 공감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Q. 총 몇 부작인가요?
A. 총 12부작입니다. 후반부 전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가 관건인데, 전반부 완성도를 보면 기대해볼 만합니다.
Q. 이호수 캐릭터가 왜 매력적이라는 건가요?
A. 연출이 그를 '멋있어 보이게' 꾸미지 않는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매력입니다. 슬로우 모션도, 과장된 연출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의 행적을 보여 주는데,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캐릭터입니다. 박진용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여기에 딱 맞습니다.
결론
미지의 서울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쌍둥이 정체 교환, 성장, 화해. 어디선가 본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구조를 정말 잘합니다. 배우의 섬세한 표현, 과장하지 않는 연출, 조연에게도 삶을 부여하는 시선이 합쳐져서 보는 사람을 서서히 잡아당깁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나는 배려한다는 이름으로 사실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질문을 꽤 오래 붙들었습니다. 드라마 한 편이 그런 질문을 던져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1화부터 딱 3화까지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후는 알아서 계속 보게 되실 겁니다.